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리 5세 (문단 편집) ===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다 === [[프로이센 왕국]]과의 [[프로이센-프랑스 전쟁|전쟁]]에서 패하여 나폴레옹 3세도 퇴위한 직후 실시된 1871년 총선에서 부르봉 정통파와 오를레앙파가 의회 다수를 차지했고, [[아돌프 티에르]]가 [[파리 코뮌]] 강제진압으로 왕당파와 공화파 모두에게서 비토당하면서, 앙리에게도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. 거기다 티에르의 후임 대통령은 [[법통주의]]자 [[파트리스 드마크마옹]]. 이 기회를 잘만 활용했으면 프랑스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았지만, 앙리는 그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. 샹보르 백작 앙리는 기본적으로 전제군주제를 선호하는 인물이었으나 시대의 흐름은 충분히 인식하는 인물이었다. "특권이니, 절대주의니, 앵톨레랑스니 떠들어대는 무지하고 어수룩한 자들"을 운운하며 [[앙시앵 레짐]]이나 [[절대왕정]]과는 명확히 선을 긋기도 했다. 하지만 그와 동시에 '입헌군주제와 공화정의 삼색기 대신 부르봉 왕조 백기를 국기로 재지정해 달라'는 조건을 걸고, 그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절대로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. 이것으로 '''프랑스의 군주정 복고 시도는 완전히 끝나고''' 왕당파도 몰락한다.[* 물론 이 협상이 실패하고 한방에 몰락한 건 아니고 서서히 의석 수가 줄어들면서 몰락해 갔다. 좌파로 유명한 [[프랑수아 미테랑]] 대통령이 1930년대 당시 극우였던 청년 시절에도 부르봉 왕조 복원 단체에 참가해 시위를 벌였던 적이 있었을 정도로 2차대전 이전까지는 주류까진 아니더라도 소수나마 복고를 주장하는 의석이 약간 있긴 했었다.] 이후 앙리는 프랑스인들은 물론 타 유럽 왕실로부터도 천치 취급을 받게 되었다. 오죽하면 이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[[아돌프 티에르]]는 "샹보르 백작(앙리 5세)이 프랑스 공화국의 수립자임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"이라고 말했다. 앙리 5세의 고집 때문에 마지막 군주정 복고 시도가 허공으로 날아갔음을 비꼰 것. 그러면 위에서 분명히 시류를 읽을 줄 안다던 앙리가 왜 그런 평가와 상반된 짓을 하면서 복고의 희망을 꺾어버렸는가? 그 배경에는 부르봉 본가와 오를레앙계의 오랜 악연에 더해, 백작 본인의 불우한 개인사에서 비롯된 악감정도 짙게 깔려 있다. 샹보르 백작은 [[7월 혁명]]으로 [[7월 왕정|오를레앙 왕조]]가 들어서면서 해외로 망명했지만, 오를레앙 왕조의 외교적인 압박으로 한 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영국과 오스트리아를 전전하며 소년 시절을 보냈다. 장성한 후에 [[양시칠리아 왕국]]의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와 결혼하려고 했으나,[* 앙리에게는 5촌 당이모였다.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의 친사촌이다.] 오를레앙 왕조가 혼담을 가로채 공주를 [[루이필리프 1세|루이필리프]]의 5남 오말 공작 앙리와 결혼시켰다.[* 그 업보인지는 몰라도 앙리와 마리아 카롤리나는 슬하에 7남 1녀를 낳았지만 전부 사산되거나 요절해서 오말 공작 알리의 가계는 단절되었다.] 같은 해에 샹보르 백작이 승마 사고를 당하자 [[고자]]가 되었다는 소문까지 퍼지게 되었다. 이후 모데나 공작의 장녀이자 자신의 6촌이기도 한 마리 테레즈와 결혼했으나, 마리 테레즈가 [[불임]]이여서 후사를 볼 수 없었다.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오를레앙파에 대한 증오심은 대단했다. 그런데 [[프랑스 제2제국]]이 붕괴한 직후 부르봉 정통파와 오를레앙파가 부르봉 가문의 수장인 샹보르 백작 앙리를 왕으로 세우고, 오를레앙 가문의 수장인 [[https://ko.m.wikipedia.org/wiki/필리프_도를레앙_(1838년)|파리 백작 필리프]][* [[루이필리프 1세|루이필리프]]의 장남이자 왕태자였던 [[페르디낭 필리프]](1842년 사망)의 맏아들. 포르투갈 국왕 [[카를루스 1세]]의 장인이자, [[후안 카를로스 1세]]의 외할머니 루이즈의 아버지이기도 하다. 참고로 부계로는 앙리와 대략 16촌간인데 모계로는 6촌이다.(필리프의 할머니 마리아 아말리아가 앙리의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의 고모)]를 그 양아들로 삼아 다음 왕으로 세운다고 합의했다. 샹보르 백작은 [[보나파르트 왕조]]보다 [[7월 왕정]]을 더 증오해서, 급기야는 [[이사벨 2세]]와의 통교 과정에서 '''오를레앙 가문에게 왕위를 물려주느니 차라리 [[루이나폴레옹 황태자|나폴레옹 4세]]를 양아들로 삼겠다'''는 뜻까지 내비칠 정도였다. 하지만 상술한 나폴레옹 3세 몰락 이후 총선에서 보나파르트파는 완전히 박살이 난 상태였고[* 그나마 나폴레옹 1세의 고향인 코르시카에서나마 의석을 약간 건지긴 했다.], 부르봉 정통파와 오를레앙파 가운데 어느 한쪽도 압도적인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지라 결국 부르봉 정통파와 샹보르 백작이 군주정복고를 이루려면 오를레앙파와 손잡는 수밖에 없었는데, 이는 백작 입장에서 정말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지였다. 허나 군주정복고를 위해 부르봉 왕조 본가와 오를레앙 가문의 대동단결을 이루자는 대의 앞에서는 딱지를 놓기가 곤란했다. 그래서 핑계로 댄 것이 부르봉 왕조 백기의 부활이다. 앙리의 의도대로 부르봉 왕조 백기를 부활시키자는 조건 덕에, 두 가문이 합쳐져 오를레앙 가문이 프랑스 왕실의 왕통을 잇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. 비록 본인은 온 유럽에서 천치 취급을 받게 되었지만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